신사와 유리구두 (8)

2024. 4. 1. 11:38소설1

 

 

맨 처음 무도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소피는 그를 보지 못했지만
공기 중에서 마법을 느꼈다 그가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동화 속에 나오는
멋진 왕자처럼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알아 버렸다 자신이
이 무도회에 온 이유가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그는 키가 컸다 보이는 부분만 봐도 얼굴이 몹시 잘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차가운 느낌을 주는 미소가 감도는 입술하며, 수염 자국이 희미하게
나타난 피부하며, 머리카락 색깔은 매우 짙은 편이었다
풍부한 갈색이랄까 일렁이는 촛불 아래서 보면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누군지 잘 아는 눈치였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다른 손님들이
몸을 움직여 그에게 길을 터주는 것을 보고 알았다 너무도 뻔뻔스럽게 그녀와
댄스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도 다른 남자들은 그냥 순순히 꼬리를 내리고
옆으로 물러섰었다
그는 핸섬하고 힘이 세다 그리고 오늘 하룻밤만큼은 그녀의 것이다
시계가 자정을 알리면 그녀는 수선과 세탁과 아라민타의 시중을 드는 노예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오늘 하룻밤, 이 아찔한 마법과 사랑으로 가득한 밤을 원하는 것이 그토록 커다란 잘못일까?
그녀는 공주가ㅡ 무모한 공주랄까ㅡ 된 기분이었으므로, 그가 댄스 신청을 해왔을 때
그의 손을 잡았다
비록 이 밤의 전부가 거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이 드레스는 빌린 것이고 신발은 훔치다시피 쓱싹
해온 것이란 걸 알지만,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히는 순간 더 이상 상관없어졌다
적어도 앞으로 몇 시간 동안, 소피는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의 남자가 될 수 있다고,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 영원히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척할 수 있었다
헛된 꿈에 불과하지만, 이런 꿈을 꾸어나 본 것이 얼마나 되었던가
모든 근심을 접고 그녀는 그를 따라 무도회장을 나섰다 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인파를 잘도 헤치고 걸었다 그의 빠른 걸을걸이에 맞춰 쫓아가다가
몇 번씩 발을 헛디디면서도 소피는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무도회장 밖 복도에 도착하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계속 저를 비웃으시는 겁니까?"
그녀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행복해서요"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는 몸짓을 해보였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해서랍니다"
"그건 또 무슨 까닭에서지요? 이러한 무도회란 것은 레이디 같은 분에게는
일상적인 삶이 아니던가요?"
소피는 씩 웃었다 그가 아마 자신을 사교계의 일원이라, 파티와 무도회에
날이면 날마다 참석하는 사람이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주리라
그가 그녀의 입가를 매만졌다
"계속 웃으시는군요" 그가 중얼거렸다 "웃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찾아들었다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아직까지는 두 사람 사이에 예의를 차릴 만큼의 거리가 남아 있다
하지만 점점 더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숨결은 자꾸만 가빠져만 갔다
"저는 레이디의 미소를 보는 게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유혹적이었다 기묘하게 쉰 듯한 목소리 때문에
소피는 하마터면 그의 말이 진심이라 믿어 버릴 뻔했다
자신이 그저 오늘 하룻밤만의 포획물이 아니라 착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를 탓하는 말투로 커다랗게 외쳤다
"여기 있었잖아!" 소피는 위장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들켰구나 이제 사람들이 날 길가로 내팽개칠 거야 그리고 내일이 되면
아라민타의 구두를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히겠지 난 이제...........
소피가 온갖 상상을 다 하고 있을 때 소리를 지른 남자는 그들 곁으로 다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신비스런 신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님이 찾고 난리가 났다고, 형님이 페넬로페와 춤을 안 추고 은근슬쩍 내뺀 바람에
내가 형님 대신 춤을 췄다는 거 아냐"
"미안하게 됐다" 그녀의 신사가 중얼거렸다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새로 도착한 남자는 얼굴을 험상궂게 찡그리며 말했다
"나 혼자만 달랑 악귀 같은 데뷔탄트들에게 던져놓고 파티에서 빠져나가 버리면
죽는 그 날까지 복수할 거야"
"한 번 해볼 만한 도박이구나" 그녀의 신사가 말했다
"내가 대신 페넬로페를 책임져 줬잖아" 다른 남자가 투덜댔다
"내가 그 옆에 있었던 게 다행이지 형님이 몸을 돌리니까 그 불쌍한 아가씨가
어찌나 낙담하던 눈치인지"
소피의 신사는 창피했던지 얼굴을 붉혔다
"어쩌겠니,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법인데"
소피는 이 남자 저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반가면을 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형제란 사실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는 그 순간 날카로운 깨달음이 왔다
이 사람들이 바로 브리저튼 가의 형제들이로구나 여긴 그럼 이 사람들의 집이고............
아, 하나님 맙소사 어떻게 사실의 테라스를 알고 있느냐는,
그야말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하고 말았구나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굴까? 베네딕트, 그래, 이 남자가 베네딕트야
소피는 브리저튼 가의 형제들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한 칼럼을 온전히 할애했던
레이디 휘슬다운에게 속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베네딕트가 형제들 가운데
가장 키가 크다고 했었다
그녀의 심장을 한 번에 세 박자씩 뛰게 만드는 이 남자는 동생보다
키가 한 3센티미터쯤은 더 컸고............
그 동생이란 남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형님이 왜 떠났는지 알겠군"
콜린이 말했다(이 사람은 분명 콜린일 것이다 설마 열네 살 먹은 
그레고리일 리는 없을테고, 앤소니란 남자는 결혼 했으니 베네딕트가 파티에서
빠져나가 자신을 굶주린 데뷔탄트들에게 던져줬다고 화를 낼 리가 없으니까)
그는 교활한 표정으로 베네딕트를 바라보았다
"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베네딕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렇게 궁금하면 네가 한 번 노력해 봐 별 성과는 없겠지만
나도 여태 성함조차 제대로 듣질 못했다"
"물어 보시지도 않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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